카테고리 없음

한국 근현대사 - (5) 식민지 시기 -1

매 석 2023. 10. 11. 22:01
반응형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년)

간단하게 식민지 시기를 이야기 하기 전에 1차 세계대전을 다루려고 한다.

삼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vs 삼국협상(프랑스, 러시아, 영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했다. 이는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이 원인으로

8월에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추가로 러시아와 영국은 패권 다툼이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삼국협상을 하며 같은 팀으로 싸웠다.

이는 국가 관계에서 영원한 적과 동맹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전쟁을 그만두었고,

결국 1922년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 즉 소련이 탄생했다.

전쟁은 미국의 참전으로 결국 독일쪽이 패배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세력은 약해지고,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미국 윌슨 대통령은 평화원칙 14개 조항을 포함한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이로 인해 패전국의 식민지가 해방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 식민지 시기 (1910~1945년) - 제1기 (1910~1919년) 무단 통치

제1기는 무단통치로 즉 헌병경찰제로 1910~1919년을 말한다.

이는 영구 병합과 동화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일본의 법과 제도를 이식하며, 교육을 통한 민족 동화 시도,

조선총독부 설치(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사권 보유), 조선통치특별주의 차별 정책(참정권x) 등을 진행했다.

또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한 조세 수입 확보, 회사령으로 회사 설립 허가제 등을 진행했으며

철도, 도로, 항만의 건설, 화폐 통합도 진행했다.

3.1 운동 (1919년)

1919년 세계는 전쟁 종전을 선언하며 민족 자결주의를 미국이 선포한다.

이에 우리나라도 민족 자결주의가 대두되고, 일제의 무단 통치에 대한 분노를 가진다.

이는 군사적 지배라는 일본식 팽창 방식이 처음으로 거부당한 저항이다.

3.1운동은 독립 선언문을 채택하며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전국적 시위로 식민지 시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참고로 일본은 영국의 동맹으로 직접적으로 전쟁을 하진 않았지만,

도움을 주며 승전국에 포함되어 있다.

3.1운동 결과로 민족 의식 고취,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며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준다.

출처 : 국가기록원

또한 1919년 9월에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한다.

이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이다. 삼권 분립, 대통령제를 실시했다.

비밀 행정 조직망, 자금 모금, 군사활동, 외교활동 등으로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국제적 승인 획득에는 실패했다. 또한 독립운동 실천 방법을 놓고 이견이 있었다.

결국 외교독립 노선, 실력양성 노선, 무장투쟁 노선 등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세력이 약화된다.

 

제2기 (1920~1936년) 문화 통치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일본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또한 국제 여론 악화로

새로운 통치 방식을 도입한다. 현병 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로 전환하며

지방 선거를 부분으로 실시한다.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한다.

하지만 여론 주도층 회유, 친일 세력 적극 육성을 진행했다.

1920~1934년에는 산미증산계획, 1920년 회사령 철폐 1923년 관세 철폐 등을 했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 1936년 조선 사상법 보호관찰령을 진행했다.

1926년 조선 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되었고, 1929년에는 순종이 승하했다.

이 당시 일상 생활의 근대적 변화가 있었다.

철도 등장, 전기 통신 시설 증가, 학교와 병원 증가, 도로 정비, 백화점, 영화, 의식주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고, 물산 장려 운동, 조선어연구회 활동 등도 이루어졌다.

당시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 경제도 후퇴했지만, 일본은 군국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예시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에 만주 국을 성립했다.

1933년 제네바 국제연행 회의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했다.

당시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참석했다.

국제연맹은 만주 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1932년에는 농촌진흥운동으로 농가 경제 안정화 방안을 추진했고,

이후 조선 공업화 추진 등의 많은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