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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 (8) 제3공화국

매 석 2023. 11. 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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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 개방화

과거 수입 대체 공업화에서 수출 주도 공업화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즉 수출진흥을 확대해 해외시장에도 나아간 것이다.

처음은 진입장벽이 낮은 경공업화를 위주로 진행했다. 특히 공산품 분야가 굉장히 크게 성장했다.

- 한일 회담과 국내 정치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도 있었지만, 결국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는 무상자금 3억 , 공공차관 2억, 민간 상업 차관 3억 달러를 포함해 총 8억 달러에 체결했다.

이후 한미일 동맹 체제를 구축하고, 경제 개발 재원을 마련했다.

개방 경제와 산업화 의지가 확고했고, 한일간 투자 및 무역 관계의 지속적 증대를 목표로 했다.

이 결과 세계은행, 아시아 은행 자금 지원과 외국 차관이 증가했다.

케네디 라운드가 1964년 체결되고 관세 인하, 자유무역에 의한 세계시장이 확대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1967년 GATT에 가입하는 등 외향적 발전 전략을 선택했다.

그 결과 1962년 5000만불이었던 수출이 1971년 10억불까지 늘었다.

- 베트남 전쟁 파병(1964~1973)

 

1차 베트남 전쟁은 1946~1954년까지 베트남과 프랑스가 전쟁했다.

이는 1954.4월 프랑스의 항복으로 막을 내리고 베트남은 독립했다.

결국 반공정부인 남과 공산정부인 북으로 베트남이 수립되었다.

1960년쯤 공산정부가 수립될 거 같아 미국이 이를 견제하려 참전했고,

그 결과 2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내에서는 인명 피해와 베트남 여론이 거세 분열이 생겼다.

이에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며 아시아는 경제 지원만 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기에 베트남은 1975년 공산화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주한 미군 축소 등의 문제로 국방력을 강화해야 했다.

-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선 개헌

1967년~1971년까지 2차 경제 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1967년 5월에는 제 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1969년 9월에는 3선 허용 개헌안을 국회에 통과시켰고 10월에는 대통령 선거를 국민투표로 확정시켰다.

1971년 4월에 제 7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박정희가 당선되어 3번째 임기를 진행했다.

경게 개발은 경부 고속도록 개통, 포항제철 완공 등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과학 기술 개발과 고급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KIST, 대덕 연구 단지, 공고, 전문대 등

다양한 교육 환경을 설립하여 우수한 기능공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7년에는 국제 기능 올림픽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 남한의 안보 위기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청와대를 기습하는 사건이 있었고

1968년 11월에는 북한 무장 게릴라가 울진, 삼척에 침투하는 일 등이 있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50만 예비군이 창설되었다.

또한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으로 박정희 정권은 자주 국방 체제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 70년대 국제 정세 : 양극 체제 균열과 데땅뜨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위상이 하락했다.

그 결과 미국 달러의 금태환 포기, 고정 환율제가 붕괴되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개선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려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며, 안전보장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또한 중화민국(대만)은 중국의 가입으로 유엔에 탈퇴처리가 되었고, 국가 지위의 위협을 받았다.

미국은 결국 1973년 파리 평화회담을 통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 새로운 남북 관계

1971년 9월 남북 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했다.

또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으로 학술, 체육 교류 등을 진행했지만 결국 관계 개선에 실패했다.

- 1970년대 초반의 위기

당시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자주 국방의 필요성이 증대했고, 경기 침체, 물가 상승도 같이 찾아왔다.

이는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수출이 한계를 겪은 결과이다.

또한 미국이 수입 할당제를 실시하여 경기 침체가 더욱 심화되었다.

더불어 야당의 성장, 근로기준법에 대한 노동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박정희 정권에 위기가 찾아왔다.

1972년 10월 결국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1월에는 유신 헌법을 12월에는 임기 6년의 제 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권한 확대가 내포되어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즉 국민의 일부가 투표하여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이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6년까지 늘리고, 중임 제한을 철폐했다.

권한은 국회 해산권, 국회의원 1/3 추천권, 대법원장 임명권, 법관 1/3 추천권, 긴급조치권 등이 있었다.

이는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행정부의 권한이 매우 강화된 형태이다.

이러한 유신 체제는 대의제적 민주주의 정치의 원리를 소멸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집권이 보장되었고, 박정희는 자주국방과 중화학 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