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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 (9) 제 4공화국, 제 5공화국

매 석 2023. 11. 2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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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공화국(1972~1980)

임기 6년과 간선제로 변경된 제 4공화국은 행정부의 권한이 대단히 강화되어

삼권분립이 깨진 상태였다.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였고,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공업에 8년간 88억 달러를 투입했다.

당시 제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6.6%로 중화학공업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였고,

1977년 100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1980년에는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54%에 달했다.

1973~1974년에는 1차 오일 쇼크로 유가가 급등하여 전 세계 경기가 위축됐다.

아 위기를 한국은 기회로 삼아, 자금이 많은 중동 지역 건설 특수를 이용하여 외화를 수입했다.

닉슨 독트린 이후 자주 국방을 위해 국방과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예비군 무장화를 위한

긴급병기 개발, 미사일, 전차 등의 국산화를 진행했다.

1978년에는 세계 7번째로 미사일을 개발하였고, 핵 개발도 추진하였지만 규제로 인해 실패했다.

영토의 산림 지역이 70~75%였지만, 과도한 벌목으로 인해 민둥산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나무 심기를 통해 산림 녹화를 진행했다.

또한 4대강인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개발하여 홍수 피해, 하천 관리, 상수도 보급 개선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개발운동으로,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 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의식개혁 계몽운동을 진행하였고, 선택적 지원을 통해

마을 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영농 기계화등이 더불어져 농가의 소득 증가, 농촌 생활 환경 개선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농촌의 전기 시설, 초가 지붕, 소득 등의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돌아와 유신 체제를 살펴보면, 삼권분립이 무너진 상태라 제대로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었고,

긴급조치를 총 7년간 9번 발동하여 체포, 구금, 압수, 수색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1975년에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있었지만 73% 찬성을 하였다.

이에 1977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인권외교를 강조하며 한국을 비판했다.

하지만 1978년 7월 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다시 선출되었다.

당시 야당 당수인 김영삼이 제명되기도 하고, 2차 오일 쇼크로 인해 대한민국에 경제에 충격이 있던

상황에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위기가 찾아왔다.

그렇기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

결국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중심의 신 군부의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제 10대 대통령으로 최규하가 선출되긴 했지만, 1980년 8월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1980년 5월에는 '서울의 봄'와 같이 민주호 시위가 있었고 이에 비상계엄으로 대응하였고

그 결과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해당 시위의 목적은 계엄 철폐,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 요구 등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신 군부 헌법 개정 착수를 진행하며, 언론 통제, 삼청교육대 등을 설치했다.

 

제 5공화국(1981~1988)

마침내 1980년 10월 개정 헌법을 확정하여 임기 7년, 단임, 간선제가 되었다.

이후 이어진 간접선거로 1981년 2월 12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5공화국은 정의사회 구현, 복지사회 건설, 민주주의 억압, 경제 위기 해결 등의 특징을 가졌다.

특히 경제는 당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 호황으로 물가 안정, 경제 성장, 수출 증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개최하는 것이 확정되며, 프로 스포츠에 대한 투자, 통금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등 유화 국면을 조성하려했다.

1983년에는 김영삼의 단식투쟁 등 전두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이 결속하였다.

1984년 5월에는 김영삼, 김대중이 협력하여 민주화 추진협의회를 만들기도 하였고,

대통령 직선제를 위해 서명 운동도 하였다.

하지만 1987년 4월 전두환은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발표하였고,

이에 6월 10일,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위 호헌을 철회하고 직선제로 개헌하자는 요구를 하였다.

결국 6월 29일 국민의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국민기본권 대폭 개선, 입법부, 사법부 권한 향상 등의

변화가 있었고, 이어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이는 야당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단일화 실패로 여당인 노태우가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신 체제 이후 국제 정세

당시 유신 체제 이후인 1970년 후반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1976년 모택동 사망 후 등소평이 1978년 중국 개혁, 개방을 실시했다.

이는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떠나 잘 먹고 잘 사는걸 중심으로 시작한 개혁이었다.

이에 반대 세력이었던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이란이 이슬람화 되었고, 미대사관 인질 사태가 발발하였다.

또한 12월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신 냉전 분위기가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1980년 이란에 잡힌 인질을 구출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1980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며 81년에 인질 문제가 해결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을 비난하며 군사비용을 늘리며 핵 미사일 방어 체계에 힘을 썼다.

소련은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필두로, 개혁, 개방을 진행하였고 큰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고, 군사 비용을 감축하기 위해

1987년 12월 미국과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조약을 했다. 또한 1988년 5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또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지하여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을 선언했다.

그 결과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 다양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해제되었다.

결국 1989년 몰타에서 미소회담을 통해 냉전이 종식되었다.

이는 1945년 얄타에서부터 1989년 몰타까지 굉장히 긴 냉전의 종식이었다.

추가로 1990년 독일이 통일했고, 91년 7월에는 NATO와 견주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었다.

1991년 8월 소련의 공산당 강경파는 이런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91년 12월 소련을 해제되었고, 러시아로 복귀하며 결국 1세계인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냉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