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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 (3) 조선 - 2

매 석 2023. 10. 1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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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점령

고종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에 보호 요청을 했다.

1884년 조선은 러시아와 통상 조약 체결과 국교 수립을 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기에 1885년~1887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이는 결국 다시 중국(청)이 중개 역할을 맡으며 더욱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게 된다.

(이 때쯤인 1889년에 일본은 헌법을 공포했다.)

 

 

미국 선교사

이전 병인박해 등 기독교에 적대적이었으나 갑신정변 때 다친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해주며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1884년 알렌이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트 모자, 헤론 등이 입국했다.

이후 광혜원(제중원) 설립하며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생기게 되었다.

추가로 시 병원, 여성전용 병원, 볼드윈 약국 등도 생겼다.

추가로 1885년 배재 학당을 아펜젤러가 설립하고, 경신 학교는 언더우드,

이화 학당은 스크랜튼이 설립했다. 이는 근대적인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우리글 언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최초의 한글 성격 책을 발간했다.

또한 전도와 교회 설립도 진행했다.

이는 청교도 정신, 백성 계몽, 신분제와 남녀차별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사진은 배재 학당이다.)

 

 

동학 농민운동(1894년)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했다. 평등과 사회 개혁 사상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교주를 처형했다.

이 때 지방관리들의 농민 수탈, 일본과 중국의 경제 침탈 심화를 배경으로

1차 농민 봉기가 1894년에 일어났다. 이는 전주성을 함락했고, 이에 왕실이 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농민군은 전주 화악 체결 후 자진 해산했다. 이때 청과 같이 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갑오변란)+(갑오개혁)

이후 청일 전쟁이 1894~1895년 발발했다. 일본군이 청군 함대를 기습 공격했고,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이는 청이 조선 문제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또한 2차 농민 봉기(우금치 전투)가 일어났지만 결국 농민군이 패배하게 된다.

 

갑오개혁(1894~1896년)

갑오개혁은 근대 국가의 제도적 토대 마련을 위해 정치, 사회, 경제를 바꾸려고 했다.

1차적으로 군국기무처 중심으로 3개월간 208건의 심의를 의결해

정치 - 국왕 권한 축소, 의정부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과거제도 폐지, 관료제 도입,

경제 - 재정 일원화, 은본위제, 급납제, 도량형 통일,

사회 - 신분제 폐지, 노비제도 폐지,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재 허용 등이 이뤄졌다.

2차는 '홍범 14조'를 선포하며 우리나라는 자주적 국가임을 알렸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책 백서이며 헌법적 성격을 띈다.

내용은 청나라의 종주권 부인, 친.인척 정비 배제, 근대적인 내각제도 확립,

조세 법정주의와 예산제도 수립,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법치주의 등의 내용이 있다.

이때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 승리 후 내정 간섭이 강화되고 있었다.

조선은 친 러시아 정채긍로 일본 견제를 시도했다.

이후 1895년 을비 사변 즉 일본군이 조선의 왕비를 시해했다.

또한 3차 개혁(을미 개혁)으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단발령의 변화가 있었고,

1896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 파천이 있었다.

이는 국가 위상 추락, 열강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독립신문(1896년)

1896년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이는 자주독립 의식과 근대의식 보급 즉 계몽을 목표로 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이며 국문과 영문판 모두 발간했다.

(서재필, 유길준, 주시경 윤치호)

또한 1896년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 정치 단체이다.

1896~1897년까지 독립문을 건립했다.

추가로 만민 공동회 개최, 헌의 6조, 근대적 의회설립 추진 등을 했지만

1898년 강제 해산당했다.

+ 고종은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