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선포(1897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국내외에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한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독자적 연호인 광무를 사용했다.
1899년에는 대한국국제를 반포하며 전제 군주제임을 알렸다.
고종은 광무개혁으로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황제권 강화, 행정제도 정비, 군제개편, 토지조사 사업, 성공업 진흥,
실업, 기술 교육기관 설립, 유학생 파견, 근대 시설 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인력과 재정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갑신정변으로 인한 인력 감소)
러-일 전쟁(1904~1905년)
당시 1894년 청일 전쟁을 일본이 승리했고, 1902년에 영-일 동맹을 맺었다.
이는 러시아와 새 유럽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러시아는 이 때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 공사가 완공 되기 전에 일본이 기회삼아 공격하였다.
당시 고종은 전시 중립선언을 하였지만 일본은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며 군용지 무상 사용 허가를 한다.
또한 1차 한일 협약을 통해 고문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일본은 열강(미,영,러)과 밀약을 체결한다. 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2차 영일 동맹이다.
결국 러일 전쟁은 일본이 승리하며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일본이 유리한 시점에 미국의 중재로 인해 배상금 없이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을사조약(1905년)
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은 을사오적에 의해 체결되었다.
이는 통감 정치의 시작이다. 과거 1차 한일 협약은 고문 정치로 외교와 재정에 관여했지만,
2차로 인해 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고종 강제 퇴위 후 순종 즉위 등이 발생한다.
이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1907년에는 한일 신협약으로 통감 권한 확대(차관 임명), 군대 해산 등이 가능해졌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 체결로 사법권이 박탈당했다.
이 때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무미를 만주에서 저격하여 사살했다.
하지만 1910년 경찰권 박탈, 한일 병합조약 등으로 대한제국은 국가 주권 소멸(경술국치)이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을 살리기 위해 항일 의병 운동, 애국 계몽 운동 등
개별적 집단적 저항을 했었다. 또한 교육, 경제, 언론을 무대로 활동했다.
신민회는 1907~1911년까지 있던 단체로 국권 회복과 근대 국민국가 건설(공화정)을 목표로 했다.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이회영 등은 민족교육 실시(대성학교,오산학교), 민족 산업 육성(자기회사, 태극서관),
대한 매일신보(일제 침략 비판,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 기지 건설(만주 신흥간습소) 등
다양한 노력을 했다.
추가로 1909년 간도협약을 중-일이 진행하며 일본이 간도를 중국 땅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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